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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0강 미래의 기원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11.27 16:46 조회 32

 

 

미래과학10
미래의 기원
강연자 : 이관수 교수(동국대 다르마칼리지)
 

과학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못지않게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명확히 밝혔다. 과학소설은 소설이 쓰일 당시의 우려와 욕망을 반영한다. 무엇보다도 과학과 기술 각각을 낳은 욕망과 충동은 성인과 아동을 가리지 않고, 인간성과 분리 불가능하다. 과학은 우리의 각자의 일부이고, 미래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 강연자 : 이관수(동국대 다르마칼리지 교수)
■ 패널 : 강윤대(동국대 다르마칼리지 교수), 정소연(SF작가/평론가)

■ 사회자 : 김근수(연세대 물리학과 교수)

 

 

강연개요 살펴보기

[ 강연자 소개 ] 

서울에서 태어나 도시 밖으로 별로 나가보지 않고 살았다. 몸을 쓰지 않는 일들 일수록 좋아한다. 대학 진학 때 역사와 물리학을 놓고 고민하다 안전하게 물리학을 선택했다. 졸업 무렵에야 과학사라는 분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서울대에서 물리학과 학사를 동대학원에서 과학사및과학철학협동과정 박사를 받았다. 대학원에서는 고전물리학사를 공부했지만, 여러가지를 조금씩 읽고 생각하는 일을 더 좋아한다. 최근에는 주로 미국의 물리학자들과 엔지니어들의 활동을 다른 서구 국가의 사례와 비교하는 작업을 거처 원자력 발전의 역사를 비교하는 일을 마무리 중이다. 현재 동국대학교에서 고전읽기, 교양과학, SF 관련 강의를 담당하고 있다.

 

[ 강연 요약문 ] 

과학은 무한한 미래를 만든다는 상투적인 말들 듣는다. 때로는 공상과학소설이 미래를 예언한다고도 한다. 심지어 과학은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준다고 한다. 죄다 틀렸거나 범죄적일 정도로 반인간적이다. 
과학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못지않게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명확히 밝혔다. 과학소설은 소설이 쓰일 당시의 우려와 욕망을 반영한다(물론 어떤 걱정과 욕망은 여러 세대 지속된다). 무엇보다도 과학과 기술 각각을 낳은 욕망과 충동은 성인과 아동을 가리지 않고, 인간성과 분리 불가능하다. 
과학(그리고 기술)은 우리의 각자의 일부이고, 미래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 강연 개요 ] 

종종 과학은 무한한 미래를 만든다는 말을 듣는다. 그렇지 않다. 
10 년 전 쯤에 택시기사분과 다툰 적이 있다. 한참 저준위 방폐장 문제로 시끄러울 때였는데, 과학이 발달해서 곧 방사능도 없앨 것이라는 기사 분의 말을 듣고 발끈했었다. 간단히 말해서 불가능하고, 풀어서 말하자면, 현재 알고 있는 근본 법칙들이 와장창 틀리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우리는 질량-에너지 보존법칙을 위배할 수 없다. 운동량 보존, 각운동량 보존, 광속 불변 모두 어길 수 없다. 과학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못지않게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명확히 밝혔다.


일찍이 루드비히 플렉의 비유가 보였듯이, 과학 활동은 미래를 불확실하게 한다.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과학은 우리가 집단적으로는 무지하거나 틀렸음을 밝히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를 잘 알면 알수록 어렴풋한 다른 의문이 구체화되거나 전혀 상상도 못했던 문제가 있었음을 그제야 느끼게 된다. 


또 공상과학소설이 과학이 만드는 미래를 예견한다는 말도 듣는다. 이 말은 다차원적으로 틀렸다. 물론 이런 헛소문이 널리 퍼진 데에는 한 SF계 인사의 탓도 크다. 전설적인 편집자 캠벨이 SF가 외삽으로 미래를 예측한다고 광고했었다.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공상과학”은 무지와 역사적 우연이 겹쳐 등장한 단어일 뿐이다. 또 거의 모든 사람들이 떠올리는 미래는 앎의 미래가 아니라 사람들의 미래, 삶의 미래이다. 

 

“미래는 앎의 미래가 아니라 삶의 미래이다.”

 

여기서 기술과 욕망이 등장한다. 기술“들”과 사회는 주거니 받거니 공진화한다. ‘앎’으로서의 과학은 우리를 규정하지만, ‘할 수 있음’으로서의 기술은 우리들의 관계를 바꾼다. 우리들 사이의 관계가 바뀌면 기술도 따라 바뀐다. 
물론 옛 SF소설 중에는 마치 현대기술을 예언한듯한 것들도 여럿 있다. 전혀 신묘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의 욕망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또 소설을 통해서 어렴풋한 욕망을 구체화하고, 그런 것들 중 지극히 일부가 기술적으로 실현된다. 수많은 명작과 불쏘시개들에 담긴 상상 중에 몇몇이 현실화됐다고 미래를 예언한다고 말하는 것은 로또번호업체가 로또번호를 맞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SF는 미래 예견 따위보다는 나와 우리 생각의 껍질을 깨어버린다는 점에서 과학의 진전을 즐기는 것과 같은 효과를 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과학과 기술과 미래의 이야기를 듣는 것일까? 또는 SF를 미래 이야기로 착각하는 것일까? 나아가 인류는 왜 집단적으로 과학과 기술을 놓지 않을까? 여러 가지 답이 있겠지만, 우리가 인간인 한, 상상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호기심과 상상력은 대부분의 생물들과 인간을 구분 짓는다. 그것들이 없다면 현재의 우리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상상은 당장의 결핍이 뒤집힌 상태를 욕망하는 것만이 아니다. 여러 가지 장애를 일일이 헤아리며 그 가능성을 탐구할수록 - 아마도 과학연구, 기술개발 과정의 희열이 클수록 - 이는‘나’를 풍성하게 하는 상상일 것이다. 우주 엘리베이터를 상상하는 것은 물질적 구현이나 소위 “기대효과”에 그치지 않는다. 기술과 분리되지 않는 인간의 여러 측면을 함께 들여다보게 된다. 세세히 꿈꿀수록, 그것이 실현되건 되지 않건, 우리가 우리 자신을 헤아리는 깊이와 폭은 넓어진다. 

 

“나태하지 않은 상상은 우리를 성장시킨다.”

 

그러기에 어린이보다 어른일수록 좋은 상상을 할 수 있고, 좋은 상상은 어린이보다 어른에게 더 필요하다. 예컨대 왜 AI를 스카이넷으로만 상상할까? 또 거대기업이 관장하는 AI만을 상상할까? 인권과 전기처럼 컴퓨팅 파워도 사람다운 삶을 위한 필수 조건이 되지 않을까? 움집에서 매캐한 연기를 맡았던 조상들처럼, 나태하지 않은 상상은 우리를 지금도 성장시킨다. 그것이 아마도 이 가을 여러 강연을 들은 우리 마음에 깔린 충동이고 미래의 기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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