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Q

과학에 관한 모든 궁금증을 루디에게 물어보세요! 최고의 과학자들이 여러분의 궁금증을 시원하게 해결해드립니다.

  • HOME
  • 라운지
  • Sci-Q
답변완료

해방 직후 한국 과학기술은 어떻게 발전 되었나요?

답변내용
휴전 직후 1953년 말 미국은 평화를 위한 원자력(Atom for Peace)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원자력 이용이 세계평화를 위한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이 전쟁으로 피폐해진 한국이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데에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한국 정부는 1956년부터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양 선진국에 유학생을 파견하기 시작했습니다. 1959년 1월에는 원자력원을 세웠고요. 이름은 원자력원이었지만 실제로는 당시 한국 과학기술을 총괄하는 연구행정기구였습니다. 1967년 원자력원이 확대되어 과학기술처가 탄생합니다. 교육의 측면에서 보면, 1960년대 중반까지 시절까지도 한국 대학의 캠퍼스에는 자격 있는 교수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해방 직후 교수들은 겨우 학부를 졸업한 정도의 수준이었고요. 이 교수들마저도 50년대 말부터 ‘원자력 유학’을 대거 떠나는 바람에 당시 학생들은 부실한 교육을 받았고, 결국 미국 등으로 유학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한국의 과학은 1966년 KIST 설립을 기점으로 발전의 길로 접어듭니다. 개화기 지지부진했던 근대과학 흡수가 해방 후 가속된 것이지요. KIST는 1965년 5월 한미정상회담의 산물이었는데, 한국군의 월남 참전에 대해 보상적인 측면이 있었습니다. 당시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이 선진국으로의 두뇌유출(Brain Drain)을 막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했고요. 1979년까지 KIST가 유치한 과학자, 기술자는 238명으로 재미한국 과학기술자 2400명 가운데 약 10분의 1이 귀국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따라서 KIST의 출발과 함께 정부 출연 연구기관의 등장으로 많은 한국의 과학자들이 귀국하여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인력 양성의 국산화가 가속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댓글

[전체 댓글수 0]

로그인 후 이용가능 합니다.

질문하기

최고의 과학자들이 여러분의 궁금증을 해결해드립니다.